남한행궁의 정문 한남루...산성과 가까이 살다보니, 남한산성 행궁의 사계절 모습을 자주 사진 찍게 된다
꽃피는 봄의 산성도 아름답지만 녹음이 짙은 여름의 남한행궁도 아름답다.
모처럼 마음 먹고 아침 6시반에 올라왔더니 모든 게 신선하고 색깔이 짙다. <2022.7.30.남한산성>
행궁의 객관으로 초입에 있다
행궁의 매표소겸 방문자 안내소...요즘은 보기 드문 초가집이다
아직 행군 문을 열지않은 시간이라 담밖에서 들여다 본 모습
행궁이란, 임금이 서울의 궁궐을 떠나 도성 밖으로 행차하는 경우, 임시로 거처하는 곳을 말한다,
국가사적 제480호인 남한산성 행궁은 전쟁이나 내란 등 유사시 후방의 지원군이 도착 할 때까지 한양 도성의 궁궐을 대신 할 피난처로 사용하기 위하여 조선 인조 3년에 건립되었다
1625년 인조 3년에 완성되었던 남한산성 행궁은, 병자호란 때 인조임금이 피란하여 직접 47일간 항전했던 곳이며 19세기 말에는 의병항쟁의 거점이기도 했었다, 그래서 일제는 이곳을 철저하게 훼손하여 1930년대에는 행궁의 초석만이 겨우 남겨졌던 아픔을 겪은 곳이다,
10년간의 복원공사끝에 2010년 10월 24일 마침내 380 여년전의 행궁 모습이 완공되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된 후로 찾는 이가 부쩍 늘어난 듯 하다
남한산성에 가시거든 행궁도 꼭 돌아보시길 권한다, 안으로 들어가 보아도 좋고, 담 밖으로 한 바퀴 돌아보아도 좋고... 전체의 모습을 보거나 사진 촬영하기에는 안에서 보다 담 밖에서도 좋다
남한산성 행궁은 우리나라 행궁중 종묘(좌전)와 사직(우실)을 두고 있는 유일한 행궁으로 유사시 임시수도의 역할을 수행했던 곳이다. 사진의 오른쪽이 좌전(종묘)이다.
행궁의 후원... 담 밖에서 바라 본 모습...넓은 후원과 정자까지 갖추어져 있다,
행궁의 중심부이며 중앙의 큰 기와집이 임금의 집무실인 내행전이고 뒷 건물은 임금의 수행 공간이며 좌우에는 오늘날의 경호실과 비서실 겪인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인조 2년 1636년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47일간 싸웠으며,이후에도 숙종,영조, 정조, 철종, 고종이 여주 이천 등지의 능행길에 머물러 이용하기도 했다.
임금의 집무실 내행전...인조 임금님의 탄식과 한숨소리가 느껴진다
약한 왕의 슬픔, 아무리 선한 왕이라 해도 나라와 백성을 지키고 보호하지 못하는 군왕은 명군이 될 수 없다는 교훈을 후세에 전해준다.
지독하게 춥던 그 해 겨울 한 달 분 밖에 없던 군량은 떨어지고, 일만삼천 조선군은 20만 청병들에게 포위되어 있던 호란의 막바지에도... 조정은 둘로 갈라져서 밤낮을 논쟁으로 지새웠다지요
한 쪽은 명에 의리를 지켜 결사항전 하자고 하고, 다른 편은 청에 항복해서 백성을 구하고 종묘사직을 지키자고 하고... 명분이냐 현실이냐? 선택의 기로에서 번민으로 밤을 새우던 그 현장,
남한산성 송림 사이로 본 행궁의 모습...처음에 나는 이 송림이 몇백년 된 조선의 소나무들인 줄 알았다,
그런데 대부분 수령이 80~90년 된 것이라니...그렇다면 일제강점기때 태어난 소나무라는 이야기가 된다,
실제로 행궁 홍보관에 전시된 흑백사진을 살펴 보면, 행궁 주변의 산이 황토가 드러난 민둥산인 시절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