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어장대(守禦將臺)는 인조 2년(1624) 남한산성을 쌓을 때 만들어진 4개의 장대 중 하나로, 장대란 지휘관이 군대를 지휘하도록 높은 곳에 쌓는 대(臺)를 말한다.수어장대는 지휘와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지은 누각으로 조선(朝鮮) 인조(仁祖) 2년(1624)에 남한산성(南漢山城) 축성(築城)과 함께 축조된 동, 서, 남, 북의 4장대(四將臺)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장대이다.
청량산 정상( 482m)에 위치하고 있어 성내와 인근의 광주,하남 및 서울,까지 조망할 수 있다. 당초에는 단층누각으로 축조하고 서장대(西將臺)라 불리었으며 남한산성의 수어(守禦)를 맡았던 수어청(守禦廳)중 우영장(右營將)이 진(陳)을 치고 있었던 곳이다. <2022.7.30.남한산성>
인조(仁祖) 14년(1636)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에는 인조(仁祖)가 친히 군사들을 지휘, 격려하며 청태종(淸太宗)의 13만 대군과 대항하여 45일간을 항전하였던 곳이며,현 건물은 헌종2년(1836)에 유수 박기수가 개건하였는데 중층(重層)의 누각건물(樓閣建物)로써 그 형태와 구성이 우리나라 전통목조건축물 중 특이한 예에 속한다. 지붕과 내부를 모두 이층으로 꾸몄으며 하층의 내진고주(內疹高柱)가 상층에서는 변주(邊柱)가 되는 평면구성방식을 택하였다.
군사 시설임에도 여덟 八자 형으로 올라간 아름다운 팔작지붕을 가지고 있다.
수원 화성의 서장대는 지금도 西將臺인데 왜 이산성의 서장대는 후에 守禦將臺로 개칭되었을까?
지킬 守에 막을 禦 字이다 어찌보면 중복과 강조의 의미가 가득 담긴 造語가 아닌가?
나라를 지키지 못한 한을 후세에 교훈으로 남기고자 하는 뜻이 담긴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수어장대의 옆모습...수어장대(守禦將臺)를 수어장대(守御將臺)로 잘못 알고 있는 이가 매우 많다,
어자가 임금 어거할 御자가 아니고 막을 禦자 수어장대임을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알려주는데, 대부분 인조임금이 항전했던 역사를 떠올려서인지 임금 어거할 어자 수어장대(守御將臺)로 잘못 알고 있다
영조 27년(1751)에는 유수 이기진(李箕鎭)이 왕명으로 서장대(西將臺) 위에 2층 누각을 건립하고 외부 편액은 수어장대, 내부편액은 무망루(無忘樓)라 이름하였다. 무망루라 함은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인조의 아들인 효종(孝宗)이 볼모로 심양(瀋陽)에 잡혀 갔다가 8년 만에 귀국하여 북벌(北伐)을 꾀하다 승하한 원한을 후세에 전하고, 그 비통함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그후 영조, 정조가 여주(驪州) 영릉(寧陵)에 참배하고 돌아가는 길에 이곳 장대에 들러 하룻밤을 지내면서 병자호란 때의 치욕사(恥辱史)를 되새겼다고 전한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기념식수한 전나무는 잘 자라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대형공사에는 비리와 모함이 있었나보다.
남한산성 축조 당시에 공사 감독관이었던 "이회"라는 분이 있었는데, 공사를 철저히 하다보니 기일내 완공하지 못했고 공사대금까지 모자라게 되었다는데,설상가상으로 이회가 주색잡기에 빠져 공사비가 부족하게 되었다는 소문까지 나돌아서 참수형에 처하게 되었다
지금이야 3심제 재판을 받아도 억울하단 이가 많은데...옛날에는 억울하게 죽은 사람 많았겠다
참수를 당하기전에 이회는 "내가 죽은후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죄가 있는 것이요,매 한 마리가 날아들면 죄가 없는 것임을 알라"는 말을 남기고 숨졌다는데..
과연 이회가 참수 당하자 매 한 마리가 날아와 이 바위에 앉아 슬피 울다 날아갔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수어장대 앞마당의 이 바위를 매바위라 부르고 있는데, 예전에는 매 발자국까지 남아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살펴 보아도 그냥 바위이다
바위에 글자4자가 새겨져 있는데 "수어서대(守禦西臺)"로 겨우 읽을 수 있다
수령 300년이 넘은 향나무... 보호수로 지정되어 수어장대를 지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