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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답사

여유당(與猶堂)

by 에디* 2013. 3. 8.

여유당(與猶堂)<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당시는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

정약용 선생의 생가인 여유당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때 유실 된 것을 1986년 복원하였다,집앞으로 내가 흐르고 집 뒤로 낮은 언덕이 있는 지형에 자리잡고 있어서 선생은 이를 수각(水閣)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정약용 선생인 생가터에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선생의 후손인 정일권 국회의장의 휘호를 자연석에 각자하여 1974년에 세운 가념비

 

생가 바로 뒤 언덕에 선생의 묘소가 있는데, 그 곳에서 내려다 본 생가 모습...

 

당호인 여유(與猶)는 1800년 (정조24년) 봄에 관직을 버리고 가족들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와서 지은 것으로 여유당기(與猶堂記)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나는 나의 약점을 스스로 알고 있다.용기는 있으나 일을 처리하는 지모가 없고,착한 일을 좋아는 하나 선택하여 할 줄을 모르고,정에 끌려서는 의심도 아니하고 두려움도 없이 곧장 행동해 버리기도 한다. 일을 그만두어야 할 것도 참으로 마음에 내키기만 하면 그만두지를 못하고,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마음 속에 담겨 있어 개운치 않으면 기필코 그만 두지를 못한다(중략)

이러했기 때문에 무한히 착한 일만 좋아하다가 남의 욕만 혼자서 실컷 얻어먹게 되었다,안타까운 일이다. 이 또한 운명일까, 성격 탓이겠으니 내 감히 또 운명이라고 말하랴.

 

老子의 말에 "여(與)여! 겨울의 냇물을 건너는 듯 하고,유(猶)여! 사방을 두려워 하는 듯 하거라" 라는 말을 내가 보았다

안타깝도다,이 두마디의 말이 내 성격의 약점을 치유해 줄 치료제가 아니겠는가, 무릇 겨울에 내를 건너는 사람은 차가움이 파고 들어와 뼈를 깎는 듯 할 터이니 몹씨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않을 것이며,온 사방이 두려운 사람은  자기를 감시하는 눈길이 몸에 닿을 것이니 참으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않을 것이다(중략)

 

내가 이러한 의미를 해득 해 낸지가 6,7년이나 된다.당(堂)의 이름으로 하고 싶었지만 이윽고 다시 생각 해 보고 그만두어 버렸었다.초천(苕川)으로 돌아옴에 이르러서 비로서 써가지고 문미(門楣)에 붙여놓고 아울러 그 이름 붙인 이유를 기록해서 아이들에게 보도록 하였다

 

(배경 설명)

정약용 선생이 형조참의로 있던 1799년(정조23년)에는 선생에 대한 노론의 공격이 극에 달하고 있었다

그 해는 채제공 선생이 돌아가신 해였는데,이 무렵 정조는 선생을 무한히 신뢰하고 있었으며 밤 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흔한 일이었고  곧 판서가 되고 제 2의 채제공이 되는 것이 시간 문제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노론 벽파는 선생을 제거하려 하였지만 방법이 없자,  형 약전을 공격하여 관직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가족이 관직을 물러나면 다른 가족도 물러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었다

 

벼슬을 그만두기로 결심한 선생은 자명소를 올려 관직을 그만 두기를 청하였다, 정조는 계속 만류하였지만 선생이 벼슬을 거부하자 할수 없이 그를 허락하였다

그리고 다음해인 1800년  가족을 데리고 고향 마현으로 돌아와서 집의 문미에 "여유당"이라는 현판을 붙이고 은신하였다

 

그 해 6월 12일 달밤에 정조의 유시를 전하려 규장각 아전이 한서선(漢書選) 10질을 가지고 찾아왔다,"5질은 남겨서 가전(家傳)의 물건으로 삼도록 하고 5질은 제목의 글씨를 써서 돌려보내도록 하라, 그리고 그대를 부르리라"

선생은 가슴이 벅차 눈물을 흘렸다, 노론 틈에 정조를 홀로 남겨 두고 온 것이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어 선생은 돌아가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나 6월 28일  정조는 노론에 둘러쌓여 의문의 죽음을 맞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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