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천주교 순교성지....저 곳을 한 번 들어가 보아야지... 마음 먹었던 게 한 두번이 아닙니다,
그러나 번번히 들어가지 못한 이유는...문앞에 아주 크게 써 놓은 안내문 때문이지요, "참배객 외에는 출입을 금합니다" 그러나 이 번에는 마침 "프란시스코 교황님"도 우리나라에 오신 기간인지라 용기를 내어 들어가 보았습니다.
전에도 성지 건물을 공사 중이더니, 지금은 옛 건물의 보수공사로 또 어수선합니다그러나 순교 성지인만큼 초입부터 엄숙하고 경건함으로 가득차 있음을 느끼며, 조용히 타 오르는 촛불과 성모상을 가까이서 또 멀리서 바라 보았습니다 <2014.8.15.남한산성>
촛불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초는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하신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미사 때에 촛불을 켜는 것은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함께하심을 나타내며, 집에서 기도할 때 촛불을 켜는 것도 빛이신 그리스도를 우리 가운데 모신다는 의미로 여긴다고 합니다, 미사 때에 제대 위에 켜는 초 개수가 때마다 조금 다릅니다. 평일이나 기념일 미사때는 2개의 초를 켜고, 주일이나 축일에는 4개의 초를 켜며. 대축일에는 6개의 초를 킨답니다, 그런데 초를 7개 켤 때가 있는데, 주교가 미사를 드릴 때입니다. 대사제인 주교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하나를 더 켜는 것입니다
담 밖에서 멀치감치 성모상을 바라 봅니다, 남한산성은 삼국시대 이래로 지리상 중요한 요충지였으며, 조선중기 때인 1577년(선조 10)에 광주부가 설치되어 지방관 부윤이 상주하다가 1623년(인조 1)에 유수부로 승격되면서 경관인 유수(종 2품)가 파견된 곳입니다.
지금으로 보면 지방공무원이 아니고 중앙공무원 유수가 파견된 셈이 아닐까요? 행궁 한켠에 유수의 집무실이 지금도 있습니다
이처럼 유수의 치소가 되면서 남한산성은 천주교 박해와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되었는데, 박해 때마다 여러곳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으로 끌려와 순교함으로써 "순교터"가 되었습니다. 최초의 신해박해(1791년)때부터 신자들이 남한산성에 투옥되었다는 전승이 내려오고 있으며, 신유박해(1801년)때에는 이곳에서 최초의 순교자가 탄생되었고. 이어 기해박해(1839년)와 병인박해(1866년)에 이르기까지 약 300명에 달하는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하였다는 것을 저는 이제야 알았으니 참으로 무지할 뿐입니다 .
순교성지 입구에는 "순교자 현양비"가 있는데...순교는 칼로 목을 베는 참수, 목을 매어 죽이는 교수, 때려죽이는 장살 등이 있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병인박해 때는 잡혀 온 신자들이 너무 많아 포졸들마저 피를 보는 것이 진저리가 났다고 전해지는데요. 이때 법에도 없는 새로운 사형 방법으로 사지를 묶고 얼굴에 물을 뿌린 뒤 한지를 덮어서 죽게 하는 백지사로 고통과 아픔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순교자 현양비에는 300여명에 달하는 천주교 순교자 중에 대부분이 아직까지도 순교자가 누군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아 더욱 슬픔이 서려 있는데, 현양비에 이름 석자 없이 "윤 서방", "이종여의 장인"으로 적혀져 있기도 합니다
남한산성 동문 옆에 있는 시구문... 저 문으로 수백명의 순교자 시신들을 성밖으로 내다 버렸다 합니다, 저 곳은 사진가들이 사랑하는 봄 야생화 청노루귀가 자생하는 곳이어서 매년 찾아가는 곳이기도 합니다. 최근에 시구문 밖에 순교자들을 기리는 표지석이 세워져서 지나는 사람들을 숙연하게 합니다
어린시절 할머니 손 잡고 고향 성당에 간 적 있고, 부모님과 형님도 천주교신자요 아내마져 천주교 신자인데...
저는 젊어서 한 목사님과 친했던 인연으로 장로교 세례를 받았는데, 천주교에 대한 호감도는 높은편...
방문자들이 성소 앞에서 촛불 올리는 것은 불교의 절 앞과 똑 같네요
색색의 촛불이 너무나 예쁩니다, 어떤이의 바램과 기원이 저리 곱게 타 오르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