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에서 내려서 출구로 막 올라서면 보이는 경복궁의 모습 <궁의 정면이 아니다>
경복궁은 1395년 창건한 조선왕조 제일의 법궁이다,북으로 북악산에 기대어 자리 잡았고 정문인 광화문 앞으로 넓은 육조거리가 펼쳐진 한양의 중심이었다,1592년 임진왜란 때 전소 되었는데 270년동안 복구되지 못하다가 1867년에 이르러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중건하였다 <2013.2.22.>
흥례문 앞에서 바라 본 광화문의 뒷모습
중건한 경복궁은 330여동의 건물들이 미로같이 빼곡히 들어선 웅장한 모습이었고 궁궐안에는 왕과 관리들이 정무를 보던 외전과 관청들,왕과 궁인들의 생활을 위한 내전,휴식을 위한 정원을 조성했으며, 왕비의 중궁, 세자의 동궁,고종이 세운 건청궁 등 크고작은 궁들이 복잡하게 들어선 궁궐 복합체이기도 했다
광화문을 들어서면 두번째 문인 흥례문이 보인다
경복궁의 바깥을 두른 담장의 길이는 1,933m에 달하고 평균 높이는 5m,두께는 2m,정도이다, 4방에는 4대문을 두었는데...동쪽은 건춘문(建春門),남쪽은 광화문(光化門),서쪽은 영추문(迎秋門), 북쪽은 신무문(神武門)이라 하였다,이는 봄,여름,가을,겨울과 나무,불,쇠,물을 상징하는 것으로 근정전을 중심으로 사방을 둘러싸고 있어 전통적인 오행설에 유래한 명칭이다
흥례문에서 관광객들이 제3문인 근정문을 바라보고 있다
국권의 상징이었던 경복궁은 일제강점기 때 계획적으로 훼손되었는데,1911년 경복궁 부지의 소유권은 조선총독부로 넘어갔으며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한다는 명목으로 주요전각 몇채를 제외하고 90% 이상의 전각이 헐렸다, 뿐만 아니라 그후 조선총독부 건물을 앞에 지어 궁 자체를 가려버렸다
다행이 1990년부터 본격적인 복원사업을 추진하여 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흥례문 일원을 복원했으며 내전과 동궁 권역도 제모습을 되찾아 가고 있다
흥례문을 지나면 영제교를 지나 제3문인 근정문 앞에 선다
경복궁의 명칭...경복궁은 조선왕조가 세워진지 3년 후에 완공되었는데,개국공신 정도전은 태조의 명에 따라 경복궁이라는 궁궐 이름을 비롯해 강녕전,교태전,연생전,사정전,근정전,등 주요 전각의 이름을 지었다,경복궁이라는 이름에는 "새 왕조가 큰 복을 누려 번영할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궁의 중심인 근정전의 정면 모습
근정전(勤政殿)은 경복궁의 으뜸 전각인 정전(正殿)으로 "천하의 일을 부지런히 하여 잘 다스리는 곳"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궐 안에서 가장 장엄한 중심 건물로 왕권을 상징하며 왕의 즉위식이나 문무백관의 조회 외국 사절의 접견 등 국가 행사를 치르던 곳이다
서쪽 회랑 모퉁이에서 바라 본 근정전
근정전은 2단의 월대 위에 다시 낮은 기단을 만들고 2층 건물을 올렸는데,안에서 보면 층 구분이 없는 통층이다,회랑으로 둘러싸고 평평한 돌을 깐 근정전 앞마당이 바로 조정(朝庭)이다
근정전은 국보 22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근정전 앞마당에 깔려있는 화강암은 햇빛으로 인한 눈부심을 줄이기 위해 일부러 거칠게 다듬었다 한다,조정 한가운데 주변보다 약간 올라온 길은 御道라 하여 왕만 다닐 수 있는 길이었다, 어도였던 길을 아는지 모르는지 관광객들은 그 길로 통행하고 있다
어도 좌우에는 신하들이 직급별로 도열하기 위한 품계석이 서 있다
경회루는 왕이 신하들가 규모가 큰 연회를 주재하거나 외국 사신을 접대하던 곳이다
흥청망청의 기원...연산군은 조선의 아름다운 여성들을 선발해 운평(運平)이라는 기생으로 만들었는데,이들 중 궁궐로 뽑혀온 기생들을 흥청(興靑)이라 하였다 연산군은 경회루에서 흥청들과 함께 유흥을 즐겼고, 결국 "맑음을 일으키는"흥청은 "맑음을 망하게"하는 망청(亡靑)이 되었다고 한다
함화당과 집경당 뒤로 국립 민속박물관이 보인다
후궁과 궁녀들의 공간이었던 함화당과 집경당...이 일대 수많은 전각들은 거의 사라졌으나 일제가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운영하면서 사무실로 쓰기 위해 헐지 않아서 남아 있게 되었다고 한다
함화당과 집경당 앞에는 흥복전이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져 발굴중에 있고, 흥복전 행각에 수다문(受多門)이 있었다고 한다, 궁녀들이 수다를 떠는 게 아니고, 왕으로부터 사랑 받고 싶었던 후궁과 궁녀들의 소망이 담겨 있는 이름이다, 그래서 문 이름이 "많이 받는다"는 受多門이었다.
왕으로부터 승은을 입은 궁녀는 여느 궁녀와 다른 대우를 받게 되지만,하룻밤 승은을 입었다고 해서 바로 후궁이 되는 것은 아니었고, 후궁이 된 후에도 왕의 부름을 기다리며 매일 애태우던 여인네들의 소망이 어린 문이 수다문이라는 것이다
고종을 위해 지은 궁안의 궁 건청궁...1873년 고종은 아버지 대원군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정치적 자립의 일환으로 건청궁을 세웠다,왕비의 처소인 곤녕합,왕의 처소인 장안당, 서재인 관문각으로 이루어졌으며1895년에 명성왕후가 시해 된 비극의 장소이기도 하다
1909년에 헐렸고 미술관이 들어섰다가 헐렸으며 2007년에야 복원되었다
경복궁 곁에 설립된 국립 민속박물관 모습
흥선대원군이 선물한 자경전...고종이 즉위하게 된 결정적 기여를 한 신정왕후 조씨를 위하여,대원군은 조대비의 거처를 궁안에서 가장 화려하고 세심하게 만들어 은혜에 보답하였다고 한다. 자경당의 慈慶은 "왕이 어머니나 할머니 등 왕실의 안어른께 경사가 있기를 바란다"라는 뜻으로 화재에 소실 되었다가 1888년에 재건하여 경복궁 침전의 전각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옛 건물이라 한다
교태전과 아미산...交泰殿은 세종 22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왕비의 침전으로 궐안의 살림살이를 총지휘하던 곳이다.교태전 뒤에 아미산이라는 왕비의 후원이 있는데,계단식 화단과 땅 밑으로 연기 길을 내어 후원으로 뽑아낸 굴뚝이 매우 아름답다
1917년 창덕궁의 침전이 소실되자 일제는 경복궁의 강녕전과 교태전 목재를 뜯어내어 창덕궁 희정당과 대조전을 짓는데 사용했다. 현재의 교태전은 1995년에 복원한 것이다
교태전 지붕의 잡상들
전하와 중전마마...왕의 호칭인 "殿下"는 궁궐의 전각과 관련있는 말이다,"전하"는 전각 아래에서 엎드려 우러러 본다는 극존칭의 의미로 강녕殿이나 교태殿에 사는 왕이나 왕비에게 붙이는 것이다 왕비의 침전은 궁궐 가운데 있고 궁궐생활의 중심이 되는 곳이기 때문에 中宮殿이라 하고, 왕비를 중전(中殿)마마라 칭한다
강녕전에서 본 사정전과 근정전
강녕전과 근정전 사이에 사정전이 있는데 이 곳이 바로 조선 국정이 행해 지던 곳이다, 왕의 공식적인 집무실인 편전(便殿)으로 사정전이라는 이름에는 왕이 정사에 임할 때 깊히 생각해서 옳고 그름을 가려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근정전에서 사정전으로 들어 가려면 사정문을 지나야 한다
매일 아침 업무보고와 회의,국정 세미나인 경연이 이곳에서 벌어졌다. 사정전 좌우에는 천추전과 만춘전이라는 보조 편전이 있는데 원래는 복도로 연결되어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 때 복도가 없어져 지금은 독립된 건물처럼 보인다, 사정전 앞 행각은 왕실의 재물을 보관하는 내탕고로 이용되었다
근정전에서 앞에서 본 근정문의 안쪽 모습...관광객들이 들어오고 있다
광화문과 해태상...일제는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을 없애려 하다가 극심한 반대에 부닥치자 경복궁 동편 건춘문 북쪽으로 옮겨 놓았다. 그 후 한국전쟁때 파괴 된 것을 1968년 철근 콘크리트로 다시 지었으나, 원래의 모습이나 위치와 차이가 있
어서 2006년에 철거하고 재 복원공사를 하여 원래의 모습과 위치를 찾아 2010년에 완공되었다
광화문 좌우에 있는 해태상은 원래 육조거리의 사헌부 대문 앞에 세워 있던 것으로 광화문에서 약 80m떨어져 있었다고 한다. 상상의 동물인 해태는 옳지않은 일을 한 사람에게 달려들어 뿔로 받아버린다는 영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