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의 법전인 인정전의 화려한 모습... 1405년(태종5) 완공되었으며, 면적 43만 4877㎡이다.
태종이 즉위한 후 1404년 한성(漢城)의 향교동(鄕校洞)에 이궁(離宮)을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완공하고, 창덕궁이라 명명하였다. 그 후 계속 인정전(仁政殿)·선정전(宣政殿)·소덕전(昭德殿)·빈경당(賓慶堂)·여일전(麗日殿)·정월전(淨月殿)·옥화당(玉華堂) 등 많은 전당을 건립하였는데, 1412년 돈화문(敦化門)을 건립하여 궁궐의 면모를 갖추었다.<2014.1.15>
이 궁전은 1592년 임진왜란때 소실되었는데, 1607년(선조 40)에 그 복구가 시작되어 1610년(광해군 2)에 중건이 거의 끝났으나, 1623년 3월에 인정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이 실화로 불탔으며 1647년(인조 25)에야 그 복구가 완료되었다. 그 후에도 화재가 여러 차례 있었는데, 특히 1917년 대조전을 중심으로 내전 일곽이 소실되어 그 복구를 위하여 경복궁 내의 교태전을 비롯하여 강녕전 동·서 행각 등의 많은 건물이 해체 전용되었다.
창덕궁은 많은 재앙을 입으면서도 여러 건물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왔는데, 1912년부터는 후원인 금원(禁苑)과 아울러 인정전을 관람할 수 있게 하였고, 8.15광복 후에도 창덕궁과 금원을 공개하고 있다. 창덕궁은 금원을 비롯하여 다른 부속건물이 비교적 원형으로 남아 있어 가장 중요한 고궁의 하나이며,1963년 1월 18일 사적 제122호로 지정되었고,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1609년에 재건된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으로 신하들의 조회,외국 사신접견 등 중요한 국가적 의식을 행하던 곳이다.
앞쪽으로 어도와 품계석을 둔 조정마당을 조성하여 국가적인 상징공간을 이루고,뒷편으로는 계단식 정원을 두어 뒷산인 매봉의 맥을 잇고 있다, 조정 마당을 둘러싼 내행각에는 호위대 주둔소와 창고 등을 두었으나 지금은 빈 회랑으로 남아 있다.
선정문을 들어 서면 선정전에 이르른다
선정전은 궁궐의 편전(사무공간)으로 왕이 고위직 신하들과 일상업무를 보던 곳으로 지형에 맞추어 정전의 동쪽에 세워졌다. 아침의 조정회의,업무보고. 국정 세미나인 경연 등 각종회의가 매일같이 열렸다.
선정전은 청기와를 올린 것과 앞쪽의 선정문까지 복도각으로 연결된 거싱 특징이며, 한 때 혼전(신주를 모시는 곳)으로 쓰였는데, 복도는 그 때의 흔적이다
대조전 일원은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이며 왕실의 큰행사도 자주 열렸다. 대조전의 창덕궁의 침전으로 대청을 사이에 두고 왕과 왕비의 온돌방이 설치되어 있으며, 홍복헌은 1910년 마지막 어전회의를 열어 경술국치를 결정했던 비운의 장소이다 1917년 불타 없진 것을 경복궁의 교태전을 옮겨지어 현재의 모습이 되었고 마지막 왕비인 순정효황후의 거처로 해방후까지 사용되었다
대조전 일원의 단청이 특별히 더 예뻐서 전각의 석가래 단청무늬를 찍어 보았다
수없이 많은 궁궐의 전각들...하도 많아서 모두 자세히 볼 수가 없다
낙선재 일원...헌종은 명헌황후에게서 후사가 없자 1847년 경빈을 맞이하여 중회당 옆쪽으로 낙선재,석복헌,수강재를 지었는데,낙선재는 헌종의 서재겸 사랑채였고,석복헌은 경빈의 처소였으며,수강재는 수렴청정이 끝난 순원왕후를 모신 곳이었다.
낙선재는 헌종의 뜻으로 단청을 올리지 않은 소박한 외형을 지녔으며 왕의 외국문물에 대한 기호를 반영한 듯 창살무늬나 건축양식 등이 청나라 양식을 볼 수 있다,낙선재 현판은 청나라의 대가 섭지선의 글씨이며,대청마루 앞 주련에는 추사 김정희의 스승 옹방강의 글씨가 있다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