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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답사

봉선사에서

by 에디* 2014. 11. 23.

국립수목원에 갔다가 근처에 있는 봉선사에 잠시 들렸다

봉선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로 교육도량으로 이름 높으며 고려대장경을 한글대장경으로 이룩해낸 이 시대의 중요한 도량이다, 고려 광종 20년(969)에 운악사로 창건 된 뒤, 조선 예종1년에 인근에 능침을 모신(광릉) 선왕 세조의 명복을 비는 사찰로 삼고 봉선사로 개칭을 하였는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소실 되어 재건 하였고 6.25 전쟁 때 다시 전소한 것을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봉선사 대웅전에는 큰법당이라는 한글현판이 걸려 있는데, 1970년 운허스님에 의해 삼창(三創)되었으며 독립운동가이며 민족교육가셨던 스님의 뜻에 따라 한글로 큰법당이라 이름하였다

 

절 입구에 이광수 기념비가 있는 사연을 실은 나도 오늘 처음 알았다,

우리나라 신문학의 개척자인 이광수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가세가 기울어 어린시절 재당숙집에 얻혀 살았는데, 그 집의 외아들 이학수가 바로 후일에 운허스님이 되었으니...이광수와 운허스님은 육촌지간이었다

1923년 금강산을 여행하다가 뜻밖에 유점사에서 승려가 되어 있는 육촌 운허스님을 만났고, 운허는 친일 변절자의 낙인으로 번민하는 춘원에게 몸소 법화경을 선물하고 불법의 세계로 인도하였다고 한다  

 

해방이 되자 춘원은 신변의 위협을 느껴 피신을 해야 했는데,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운허스님이 봉선사에 방 한칸을 마련해 주시니 춘원은 운허스님이 계시는 봉선사로 입산을 하게 되었다

이에 춘원은 법화경을 탐독하며 죄인의 심경으로 돌베개를 베고 살았으며 이때 진지한 내면의 고백이 후일 "돌베개"라는 수필집으로 탄생하였다, 6.25 전쟁 때 북으로 납치 된후 소식을 모르게 된 터에 1975년 주요한을 비롯한 문인들이 그와 연고가 있는 봉선사에 기념비를 세우자는 뜻을 모아 이 비가 세웠졌다

 

봉선사 당간지주석...당간 지주는 없지만 규모를 짐작할 수 있겠다

 

고목의 뚫린 구멍으로 바라 본 큰법당...한글대장경 번역을 완성한 절 답다

 

큰법당 앞, 예전에 천왕문과 해탈문이 있던 자리에 지금은 청풍루가 세워졌고 청풍루 아래를 통과하여 큰법당에 이르게 되고... 그 길에 촛불은 꺼지지않고 조용히 제몸을 태워 올린다

 

보물 제 397호 봉선사대종...1469년(예종원년)에 주성되었으며 높이 229.4cm, 지름 156.0cm 세조대왕의 치적을 기리고 명복을 빌기 위하여 정희왕후의 발원으로 제작되었다 15세기 후반 한국종의 문양이 잘 반영된 조선 전기의 조형성보여주는 종이

 

로 지은 범종각...대종은 원래 저 뒤편 종각에 있었는데 새로 지은 범종각 아래층으로 옮겨왔다

 

오래전 봉선사에 처음 왔을 때 이 느티나무 단풍이 참 고왔었

 

하마비는 사원이나 종묘,대궐,성현들의 출생지나 무덤 앞에 세워 놓는 석비로 노소를 막론하고 말에서 내려 존경을 표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 봉선사 하마비는 1469년 세조대왕의 위패를 어실각에 모셔놓고 중창불사를 하면서 세워진 것으로 이 곳을 지나가는 정승 판서도 모두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 했다,높이 93cm의 대리석에 大小人員皆下馬(대소인원개하마) 라고 음각 되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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