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행궁 건축의 백미라고 하는 화성행궁의 정문인 신풍루(新豊樓)...신풍이란 "국왕의 새로운 고향"이란 뜻으로 정조대왕의 수원사랑을 보여 준다,4월~11월간 매주 일요일 오후 2시에 신풍루 앞에서는 장용영 수위의식이 재연된다, 광화문과 대한문 앞의 수문장 교대식과 같은 것으로 행궁을 지키는 수위교대식과 장용영 군사 훈련 모습을 재연한다 <2014.11.29. 수원 화성>
화성행궁 앞의 넓은 광장
화성행궁은 1789년(정조13년) 수원 팔달산 동쪽에 건립되었는데, 수원부 관아와 행궁으로 사용되다가 1794년부터 1796년까지 진행된 화성축성 기간에 화성행궁을 확대하여 최종 완성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여 부친인 사도세자(장헌세자)의 원침인 현륭원(현재의 융릉)을 13차례나 찾았던 정조는 참배기간 동안 화성행궁에서 유숙하였다. 건립 당시에는 600여칸의 정궁 형태로 규모가 가장 큰 아름다운 행궁이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일제의 민족문화와 역사 말살정책에 따라 낙남헌을 제외하고 모두 헐어내 사라졌다.
1996년 복원공사가 시작되어 2003년 마침내 화성행궁 1단계 복원이 완료되었다
매주 토요일 오후 2시에는 토요상설공연이 펼쳐진다, 이 날은 양주별산대놀이가 흥겹게 공연되고 있다.
산대놀이에 사용되는 삼현육각 악사들...보통 피리 2, 대금 1, 해금 1, 장고 1, 북1,로 구성된다
산대(山臺)놀이라는 명칭을 쓰고 있으나 산대를 만들어놓고 하는 것은 아니며 조선 후기 산대의 전통을 이어서 연행된다는 의미에서 산대놀이 또는 별산대놀이라는 명칭을 쓰게 되었으며 요즈음은 주로 경기도지역에서 하는 탈놀이를 산대놀이라 지칭한다.
토요상설공연은 정문인 신풍루 앞 광장에서 공연되고 있는데, 끝까지 볼 시간은 없고 아쉽게 일어섰다
정문안 오른쪽 집사청 앞에는 소원나무가 있다...벼락 맞은 나무라는데 여기서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600칸이나 된다니 전각이 무지 많은데, 그중에서도 중심 건물인 봉수당은 임금 행차시 정전으로 쓰이며 왕권을 상징하는 편전공간으로 연출하였으며 정조대왕은 이곳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열었다
이 때 정조는 "만년(萬年)의 수(壽)를 받들어 빈다"는 의미로 봉수당이란 당호를 지어 조윤형으로 하여금 현판 글씨를 쓰게 하였다
도성의 궁궐 편전 모습과 같이 일월오악도를 배경으로 용상이 배치되어 있다
편전 옆에는 정조대왕이 집무를 보는 모습이 재현되어 있다...오, 비운의 개혁군주 정조대왕
봉수당 오른쪽의 장락당...화성행궁의 침전으로 정조대왕이 헤경궁 홍씨의 만수무강을 빌며 직접 편액을 써서 걸었다
낙남헌...1795년 혜경궁 홍씨 회갑연 기간중 과거시험과 양로연등 행사가 열렸던 곳
정조의 어진을 모신 화령전의 중심 전각인 운한각...가운데 약간 도드라진 길은 어도로 왕만이 다닐 수 있는 길인데...
정조대왕의 어진...수백년 세월이 흘렀지만 사람들은 참배는 하지 않고 멀둥멀둥 바라보다 가누나
화령전(華寧殿)은 1801년(순조원년) 정조대왕의 유지를 받들어 화성행궁 옆에 세운 정조의 영전(影殿)이다, 제사를 지내기 위해신위를 모신 사당과 달리 영전은 보통 선왕의 초상화를 모셔놓고 생전에 계실 때와 같이 봉안하는 곳이다
낙남헌을 돌아 나오다 문을 들여다보니...노래당(老來堂)이라는 현판이 보인다
노래당은 정조대왕이 늙으면 왕위를 물러나 슬픈 부친의 능이 있는 수원으로 돌아와 노후생활을 보내려고 지었다는 집이다, 그러나 개혁을 꿈꾸던 왕은 이곳으로 돌아오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