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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답사

창덕궁

by 에디* 2015. 6. 23.

돈화문을 지나 금천교를 건너 2시간 동안 시간 때우러  창덕궁으로 들어선다

우산을 빌려 쓰고 왔는데, 비가 그친 건 고마우나  카메라까지 들고 우산은 짐이 되고 말았다

찬찬히 생각하며 보는 게 아니고 대충 돌아보는 창덕궁인데, 메르스 탓인지 정말 관광객이 뜸하다 <2015.6.5.>

 

창덕궁은 1405년 (태종 5년) 조선왕조의 이궁으로 지은 궁궐인데. 경복궁의 동쪽에 위치한다 하여 이웃한 창경궁과 더불어 동궐이라 불렀다.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불에 타자 광해군 때에 다시 짓고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하기까지 정궁 역할을 하였다.
조선의 궁궐 중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임금들이 거처했던 궁궐이라 한다.

 

진선문에서 바라본 숙장문...이 문에는 신문고를 설치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는데, <경국대전>에는 ‘원통하고 억울함을 호소할 자는 소장을 내되, 그래도 억울하다면 신문고를 두드려라’라고 신문고 치는 절차를 밝혀 놓았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이 이러한 절차를  밟기도 어려웠거니와,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 돈화문을 통과하여 신문고를 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따라서 두드리기 힘든 신문고였다고 한다.

 

중동독감 때문에 외국 관광객들이 많이 줄었다는데  한무리의 외국인들이 들어선다, 괜찮아...관광 와도...

 

인정문 앞...저 문을 들어서면 인정전이다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正殿)으로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 접견 등 중요한 국가적 의식을 치르던 곳이다. 앞쪽으로 의식을 치르는 마당인 조정(朝廷)이 펼쳐져 있다.
2단의 월대 위에 웅장한 중층 전각으로 세워져 당당해 보이는데, 월대의 높이가 낮고 난간도 달지 않아 경복궁의 근정전에 비하면 소박한 모습이다. 인정전은 겉보기에는 2층이지만 실제로는 통층 건물로 화려하고 높은 천장을 볼 수 있다.

 

인정전에서 희정전으로 가는 문

 

인정전의 내부...바닥에는 원래 흙을 구워 만든 전돌이 깔려 있었으나, 지금은 마루로 되어있다. 전등, 커튼, 유리 창문 등과 함께 1908년에 서양식으로 개조한 것이다

1405년(태종 5)에 창덕궁 창건과 함께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10년(광해 2)에 재건, 1803년(순조 3)에 소실된 것을 이듬해에 복원해 현재에 이른다. 인정전은 국보 제225호로 지정되어 있다

 

선정전...왕의 공식 집무실인 편전(便殿)으로, 지형에 맞추어 정전인 인정전 동쪽에 세워졌다. 아침의 조정회의, 업무보고, 국정 세
미나인 경연 등 각종 회의가 이곳에서 매일 열렸다. 이름이 참 좋다 "정치는 베풀어야 한다"는 뜻의 宣政殿이다.

임진왜란과 인조반정 등의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647년(인조 25)에 재건하였으며 현재 궁궐에 남아 있는 유일한 청기와 건물이다.

 

희정당 뜰에서 바라본 외행각과 인정전의 모습

 

희정당...인정전이 창덕궁의 상징이라면 희정당은 왕이 가장 많이 머물렀던 중심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이름은 숭문당이었으나 1496년(연산2)에 희정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원래의 편전인 선정전이 비좁고 종종 국장을
위한 혼전으로 쓰이면서, 침전이었던 희정당이 편전의 기능을 대신하게 되었다.
지금의 희정당은 1917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20년에 복구하였는데, 재건된 희정당 내부는 쪽마루와 카펫,유리 창문, 천장에 샹들리에 등을 설치하여 서양식으로 꾸며졌다. 보물 제815호로 지정되어 있다.

 

못 다 핀 개혁정치의 꿈, 효명세자(孝明世子)... 희정당은 순조의 아들이며 헌종의 아버지인 효명세자가 승하한 곳인데, 외모와 총명함은 물론이고 책을 좋아하는 모습까지 할아버지 정조를 빼닮았다고 전해지는 효명세자. 순조의 명으로 19세에 대리청정을 시작한 효명세자는  참신한 인재를 등용하고 개혁정치를 펼쳤다. 그러나 아버지의 희망, 할아버지의 이상, 그리고 조선 백성들의 염원을 채우지 못한 채 22세의 꽃다운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으니, 정사를 돌본 지 겨우 3년 3개월 만이었다

 

낙선재...조선 24대 임금인 헌종은  경빈(慶嬪)으로 맞이하며 1847년(헌종13)에 낙선재를, 이듬해에 석복헌(錫福軒) 등을 지어 수강재(壽康齋)와 나란히 두었는데, 낙선재는 헌종의 서재 겸 사랑채였고, 석복헌은 경빈의 처소였으며, 수강재는 당시 대왕대비인 순원왕후(23대 순조의 왕비)를 위한 집이었다.

후궁을 위해 궁궐 안에 건물을 새로 마련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헌종은 평소 검소하면서도 선진 문물에 관심이 많았다. 그 면모가 느껴지는 낙선재는 단청을 하지 않은 소박한 모습을 지녔으며, 석복헌에서는 순종의 비 순정효황후가 1966년까지 기거하였고, 낙선재에서는 영왕의 비 이방자 여사가 1989년까지 생활하였다.  보물 제 1764호로 지정되었다.

 

희정당 앞에서 보는 인정전의 옆모습

 

대조전... 창덕궁의 정식 침전(寢殿)으로 왕비의 생활공간이다.  대조전 주변의 흥복헌(興福軒)은 1910년 마지막 어전회의를 열어 경술국치가 결정되었던 비극의 현장이다. 1917년 불타 없어진 터에 1920년에 경복궁의 침전인 교태전을 옮겨 지어 현재의 대조전이 되었다. 희정당과 마찬가지로 내부는 서양식으로 개조하였으며, 왕실생활의 마지막 모습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고. 보물 제816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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