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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답사

성균관

by 에디* 2016. 11. 18.

서울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대학교 정문으로 들어서면 오른편에 조선 왕조 최고의 교육기관 성균관(成均館)이 자리 잡고 있다.

일찍이 공자(孔子, B.C. 551~B.C. 479)는 은행나무 아래서 강학(講學)했다. 이후로 선비들이 모여 학문을 익히는 곳을 행단(杏壇)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은행나무는 유학(儒學)을 상징하는 나무가 되었다.그래서 서원이나 향교에는 ‘학자수’라고도 불리는 회화나무와 함께 은행나무가 서 있곤 한다.

 

공자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大成殿)은 은행나무 남쪽에 있다. 공자의 위패를 중심으로 4성(聖)과 제자 10철(哲), 송조 6현(宋朝六賢), 우리나라 18현(賢) 등 모두 39위패가 동서로 봉안돼 있다. 매년 양력 5월 11일과 9월 28일, 두 차례에 걸쳐 석전제(釋奠祭)를 올린다.

중요 무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된 석전제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에만 원형이 보존돼 있다. 대성전 앞뜰에는 두 그루의 향나무가 서 있다. 가지가 세 개로 나눠진 동쪽 것은 ‘삼강목(三綱木)’이고 5개로 나눠진 서쪽 것은 ‘오륜목(五倫木)’이다. 이런 삼강목, 오륜목은 전국 234개의 향교 앞마당에 거의 어김없이 심어져 있다.<2016.11.12.>

 

성균관에서는 전국에서 선발된 유생들이 유교 경전과 과거 과목을 커리큘럼으로 삼아 공부에 정진했다. 성적은 통(通), 약(略), 조(粗), 불(不)로 구분했다. 오늘날의 A, B, C, F 학점과 같다.정원은 200명이었지만 나중에 126명으로 조정했고 말기에는 100명으로 축소했다. 학생들은 생원(生員), 진사(進士), 사부학당(四部學堂, 성균관 부속 중등교육기관)과 문음자제(門蔭子弟) 가운데서 뽑혀 올라온 승보생(陞補生)으로 구성되었다. 입학 연령은 15세 이상의 남자였는데 50세의 중년 입학생도 있었다.

 

성균관 유생들은 조선 팔도에서 뽑혀 올라온 생원, 진사 시험에 합격한 수재들이다. 요즘으로 치자면 수능 0.1퍼센트 이내에 든 젊은 지성들이다. 그들의 일상을 보면 요즘의 대학생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정조(正祖, 1752~1800) 때 문신 윤기(尹祁, 1535~1607)가 대학 시절을 회고하며 220편의 한시로 읊은 『반중잡영(泮中雜詠)』을 보면 신입생 환영회, 음주 강요, 시험 부정행위, 패싸움, 성폭행, 구기대회, 데모, 농성 등 있을 것은 다 있었다.

 

오래된 왕립대학 성균관의 종합 강의실 명륜당(明倫堂)이 웅장하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은 이곳 성균관 대사성(大司成, 정3품 벼슬)을 세 차례나 지냈다. 대사성은 요즘으로 치면 대학 총장이다.

 

명륜당을 중심으로 좌우로 동재와 서재가 있는 공간이 성균관의 교육공간으로 1398(태조7)년에 설립되어 왕세자까지 교육시킨 조선 최고의 학부이며 때때로 과거시험의 장소로도 사용 되었다

"명륜(明倫)"이란 인간사회의 윤리를 밝힌다는 뜻으로 현판 글시는 1606년(선조39) 명나라 사신 주지번이 쓴 것으로 전해진다

명륜단 좌우의 동재와 서재는 학생들의 기숙사이며 뒷쪽에는 도서관인 진경각과 활과 화살을  보관하는 육일각이 있는데 이는 선비들이 문무를 겸비하는 교육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명륜당 앞의 노거수 은행나무는 1519(중종14)년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윤탁이 심은 것으로 전해지는데 이는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서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고사에 따른 것이라 한다

 

황금색으로 물든 성균관의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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