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령에서 1 ― 정덕수
온종일 서북주릉(西北紬綾)을 헤매며 걸어왔다.
안개구름에 길을 잃고
안개구름에 흠씬 젖어
오늘 하루가 아니라
내 일생 고스란히
천지창조 전의 혼돈
혼돈 중에 헤메일지.
삼만 육천오백 날을 딛고
완숙한 늙음을 맞이하였을 때
절망과 체념 사이에 희망이 존재한다면
담배 연기빛 푸른 별은 돋을까
저 산은,
추억이 아파 우는 내게
울지 마라
울지 마라 하고
발 아래
상처 아린 옛 이야기로
눈물 젖은 계곡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저 산은,
구름인 양 떠도는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홀로 늙으시는 아버지
지친 한숨 빗물 되어
빈 가슴을 쓸어내리네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온종일 헤매던 중에 가시덤불에 찢겼나 보다
팔목과 다리에서는 피가 흘러
빗물 젖은 옷자락에
피나무 잎새 번진 불길처럼
깊이를 알 수 없는 애증(愛憎)의 꽃으로 핀다
찬 빗속
꽁초처럼 비틀어진 풀포기 사이 하얀 구절초
열 한 살 작은 아이가
무서움에 도망치듯 총총이 걸어가던
굽이 많은 길
아스라한 추억 부수며
관광버스가 지나친다.
저 산은 젖은 담배 태우는 내게
내려가라
이제는 내려가라 하고
서북주릉 휘몰아온 바람
함성 되어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나는 시인 정덕수를 모른다, 중앙의 문단과 먼, 한계령 오색 약수터 인근 마을에서 사진 찍고, 시를 쓰며, 산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학력이 변변치 않았던 18살 청년 정덕수는 고향인 강원도 양양 오색약수터 마을에서, 시에서처럼 ‘온종일 서북주릉(西北紬綾)을 헤매며 걸어’ 한계령을 넘다가 오색을 바라보며 문득 떠오른 시상을 적은 게 이 시라고 한다. 어린 시절 회고부터 가정 사정까지 그리고 산을 타며 느낀 여러 상념들…… 열여덟 청년의 진솔한 회한이 담겼다.
하덕규 작곡/양희은이 부른 <한계령>의 원시가 정덕수의 "한계령에서1"이다.
시도 좋고 노래도 좋와서 2014년에 한계령을 넘으며 찍었던 사진 몇장을 찾아서 엮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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