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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답사

충청수영성(忠淸水營城)

by 에디* 2020. 2. 24.

충청수영성(忠淸水營城)은 서해로 침입하는 외적을 막기위해 돌로 높이 쌓아올린 석성(石城)이다.

조선 중종 4년(1509)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이장생(李長生)이 축성, 충청수영(忠淸水營)의 외곽을 두른 1,650m의  성(城)으로 서해안방어의 요충지였다. 사방(四方)에 4대 성문(城門)과 소서문(少西門)을 두었고, 동헌을 비롯한 관아건물 영보정(永保亭), 관덕정(觀德亭), 대섭루(待燮樓), 능허각(凌虛閣), 고소대(姑蘇臺) 등이 있었으나 허물어졌고, 서문 망화문(望華門)과 건물로는 진휼청(賑恤廳), 장교청(將校廳), 공해관(控海館)이 보존되고 있다. 망화문은 화강석을 다듬어 아치(Arch)형으로 건립하여 발전된 석조예술을 볼 수 있다.(2020.2.22.보령)

 

충청수영성은 고종 33년(1896) 폐영(廢營)되었으며, 그 규모는 『세종실록지리지』 기록에 따르면 조선 초기 충청수영과 그 산하에 배속된 군선과 병력이 군선(軍船) 142척에 수군 수(水軍數)가 총 8,414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충청도 서해안 지역에 위치하여 한양으로 가는 조운선(漕運船)을 보호하고 왜구침탈을 방지했다. 선조 29년(1596), 충청수사 최호가 충청수영의 본영과 속진의 수군을 이끌고 남해 한산도에 머물며 수군통제사 원균의 지휘를 받다가 이듬해인 선조 30년(1597) 7월 1일 일본군에 패하여 통제사 원균과 함께 전사했다.

 

충청수영성은 천수만 입구와 어우러지는 경관이 수려하여 조선시대 시인 묵객들의 발걸음이 잦았던 지역으로 성내의 영보정이 유명했고, 서문 밖 갈마진두(渴馬津頭)는 충청수영의 군율 집행터로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천주교 신부 다섯 명이 순교한 곳이다. 근대에 들어 도로개설이나 호안매립 등으로 인하여 훼손된 일부 구간을 제외하면 충청수영성은 나머지 성지(城址) 뿐만 아니라 그 주변 지형이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성내 가장 높은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는 영보정(永保亭)

 

 

망화문(望華門)안에서 바라 본 오천항

 

진휼청(賑恤廳)은 흉년때 충청수영 관내의 빈민구제를 담당하던 곳으로 수영이 폐지된 후 민가로 사용되다가  1994년에 매입하여 보존되고 있으며 충청수영 고지도 등의 건물배치도로 볼 때 진휼청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진휼청 앞에서 내려다본 오천항...충청수영의 역사를 지켜 보았을 고목이  토사의 유실로 뿌리를 들어낸 채 푸른 바다를 굽어보고 있다

 

성벽 안길을 걸어 오르면 진휼청과 영보정에 이르른다

 

영보정 앞 언덕은 바다로 떨어지는 절벽이니 수군의 요새로 적지였겠다

세월이 흐른 현재는 바다를 가로지른  방조제가 보인다

 

오천항(鰲川港)은 백제때부터 중국과 교역하던 항구로서 회이포(回伊浦)라 불리었고, 고려시대에는 왜구를 물리치기 위하여 많은 군선(軍船)을 두었으며, 세조 12년(1466년)수영(水營)을 설치, 충청수군의 최고사령부로 서해안을 방어하였다.

 

그 옛날 충청수영의  군선 대신에 지금은 어선들이 평화롭게 정박하고 있

 

 

"동백꽃 필무렵"이란 드라마 촬영지였나 보다...(나는 드라마를 거의 안보는 관계로 모르지만....)

 

성앞에는 소박하도 아담한 교회당이 서 있다

 

예전에는 군항이었으나 지금은 어항이고 "키조개 코스요리"가 유명하다

실은 가족과 함께 키조개를 맛보려고 온 셈인데, 4~5종의 키조개 코스요리가 1인당 25,000이었다

 

키조개는  매우 큰 조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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