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는 지독한 안개가 서리더니, 한낮이 되자 청명한 가을날씨가 맞아주던 날
친구 김박사의 안내로 그의 고향이기도 한 충남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에 소재한 명재고택을 찾았다,
삼백년 된 느티나무가 에워싸고 있는 아늑한 명당 고택의 가을에 흠뻑 빠져 본 하루였다 <2015.11.4. 논산>
명재고택은 조선 숙종 때의 유학자인 윤증(尹拯) 선생의 가옥으로, 그의 호를 따서 명재고택이라 불린다.
그는 임금이 여러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사양했을 만큼, 성품이 대쪽 같았다 하며. 검소와 나눔의 미덕을 몸소 실천하고 후대를 가르쳤는데, 그 덕분에 은혜를 입은 사람들에 의해 동학혁명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고택이 소실될 뻔한 위기를 면할 수 있었다 한다.
이와 같은 윤증 선생의 성품을 반영하듯 고택은 다른 사대부 집안의 가옥에 비해 겉모습이 소박하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기품이 느껴질 뿐 아니라, 곳곳에 숨겨진 과학적 설계에 감탄하게 된다.
매우 많은 항아리들은...후손이 장유사업을 하는 게 아닐까? 생각되는데 물어 볼 수도 없고...ㅎ
고택은 노성산 남쪽으로 흘러내리는 남사면에 남향으로 자리 잡았고, 집 평면구조는 ㄷ자형의 안채와 ㅡ자형의 사랑채가 조합을 이루어 전체적으로 ㅁ자형을 이루는 가옥이며 뒷쪽 사면에 사당이 있는 형태이다
사랑의 앞은 넓은 마당이 조성되어 있고 마당의 왼쪽으로 우물과 연못이 있다
윤증...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자인(子仁), 호는 명재(明齋)·유봉(酉峰).
성혼(成渾)의 외증손이고, 아버지는 선거(宣擧)이며, 어머니는 공주 이씨(公州李氏)로 장백(長白)의 딸이다.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리될 때 소론의 영수로 추대되어 송시열(宋時烈)과 대립하였다
윤증의 생애... 1642년(인조 20) 아버지 선거와 유계(兪棨)가 금산(錦山)에 우거하면서 도의(道義)를 강론할 때 함께 공부하며 성리학에 전심하기로 마음먹었다. 1647년 권시(權諰)의 딸과 혼인하고, 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이후 김집(金集)의 문하에서 주자(朱子)에 관해 배웠고, 1657년(효종 8) 김집의 권유로 당시 회천(懷川)에 살고 있던 송시열(宋時烈)에게서 『주자대전』을 배웠다.
효종 말년 학업과 행실이 뛰어난 것으로 조정에 천거되었고, 1663년(현종 4) 공경(公卿)과 삼사(三司)가 함께 그를 천거하여 이듬해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제수되고 이어서 공조랑·사헌부지평에 계속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682년(숙종 8) 호조참의, 1684년 대사헌, 1695년 우참찬, 1701년 좌찬성, 1709년 우의정, 1711년 판돈녕부사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나가지 않았다. 1699년 아버지가 죽자 거상(居喪)을 주자의 『가례』에 의거하여 극진히 하였다.
학질을 앓다가 1714년 정월 세상을 떠났다.
마당에서 바라보는 전경...노성산을 배경으로 아늑하게 남향하고 있다
맨 앞이 사랑채인데 사진에는 보이지 않으나 "舍時隱離"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멀리 떨어져 은거하며 때를 기다리노라...하는 명재의 마음이 스며있는 현판이 아닐까?
이 많은 항아리들에 장이 담겨 있는지...?
오래 묵은 장이 귀하고 좋은 장이라는 말도 있는데, 어느 항아리엔가 3백년 된 장이 들어 있을지도...
명당터에 아름다운 고택과 어울리는 장맛도 향기로울 듯...
고택으로 들어가는 마을 어귀에는 명재의 어머니 이씨부인의 정려가 있다.
명재의 아버지 윤선거는 변자호란이 일어나자 부인과 함께 강화도로 들어가 항전하였는데, 성이 함락되자 이씨부인은 오랑캐에게 죽느니 차라리 목숨을 끊으리라 하고 강화에서 순절하였으며 후에 공주이씨에게 경경부인을 증직되었고 숙종 7년에 정려를 세웠다
사랑채 앞마당 왼편에 사각형의 연못이 있는데 작은 섬의 오래된 배롱나무가 꽃이 피면 참 예쁠 듯...
이 건 분명 고인돌...? 그렇다면 이 마을은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터전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