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수유나무 뒤에서 혹은 진달래 뒤에서 소화테레사수녀상을 바라 보았다
이 브로그를 오랫동안 보신 분은 금방 아시겠다 " 음! 그 때로구먼...!" ㅎ
옥천성당 높다란 언덕의 소화테레사상을 이때쯤이면 찍어온 게 십년도 넘기 때문이다
어머님의 기일이 오면, 한낮에 고향에 도착하고, 밤까지 할일도 없고해서 늘 성당에 올라왔다
정지용 시인의 생가나 혹은 육영수여사 생가를 돌아보기도 한다<2018.3.27.옥천>
유년기와 소년기를 보낸 고향을 떠난지도 50년 가까이 되니, 친구도 별로 없고, 새로운 건물과 사람들로 바뀌어 버린 읍내를 두세시간 돌아다녀도 아는 이를 만나지 않을만큼 이제는 어찌보면 말만 고향인 셈이다
모든 것이 다 바뀌었지만 성당만은 그대로다
그 흔한 타일 한장 붙이지 않은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게 여간 고마운 게 아니고, 할머니와 부모님께서 영세받으시고
다니시던 성당이라 더욱 마음이 가는 지도 모른다
유년기에 할머니 손에 끌려 드나들었던 성당인데, 그 땐 가기싫었다. 지금처럼 의자도 없고 마루바닥에 쪼그리고 앉아야 했고,
그 때도 소화테레사상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실, 오랫동안 소화테레사상과 성모상을 구별하지도 못했다.
본당 앞 한 쪽에 성모상은 따로 서 있으며 가슴에 안고 있는 십자가와 장미꽃이 성모상과는 다르다
그래서 소화테레사 수녀에 관해서 인터넷 검색을 해보면,
24세의 꽃다운 나이에 죽은 프랑스 수녀 소화테레사는 9년 반의 수도원 생활을 하였는데, 그녀가 남긴 자서전이 전세계에
"폭풍과 같은 열광"을 불러 일으켰고 감동을 주었다
1897년 9월 30일 “나의 하느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저의 소명, 마침내 저는 그것을 찾았습니다.
제 소명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교회의 품 안에서 제 자리를 찾았습니다. 저의 어머니이신 교회의 심장 안에서
저는 ‘사랑’이 될 것입니다.” 하며 숨을 거두었고... 이렇게 먼나라 성당앞에까지 서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