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만의 위안 조병화
잊어버려야만 한다
진정 잊어버려야만 한다
오고 가는 먼 길가에서
인사 없이 헤어진 시방은 그 누구던가
그 사람으로 잊어버려야만 한다
온 생명은 모두 흘러가는 데 있고
흘러가는 한 줄기 속에
나도 또 하나 작은
비들기 가슴을 비벼대며 밀려가야만 한다
눈을 감으면
나와 가까운 어느 자리에
싸리꽃이 마구 핀 잔디밭이 있어
잔디밭에 누워
마지막 하늘을 바라보는 내 그날이 온다
그날이 있어 나는 살고
그날을 위하여 바쳐온 마지막 내 소리를 생각한다
그날이 오면
잊어버려야만 한다
오고 가는 먼 길가에서
인사 없이 헤어진 시방은 그 누구던가
그 사람으로 잊어버려야만 한다
"헤어진 다음날"이란 노래가 있다,생생하고 사실적인 가사가 압권이다,그에 따르면 이별이란 이별후에 찾아오는 "견딜 수 없이 긴 하루"를 견디는 일이다."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날"에 무엇이라도 해야하는 일이다.
이별 뿐이겠는가? 시험에 실패하고,직장을 잃고,사랑하는 이의 장례식을 치른 다음 날들...상처의 편에서 보면,상처의 다음날과 그 다음날들이 모여 삶을 이룬다, 우리가 살아 온 많은 날들이 그러했다.
그 "하루"에 바쳐진 이 시는 "잊어버려야 한다"는 말을 주문처럼 반복한다, 상처의 내용은 희미하게 그린 반면 상처를 견디는 방법은 선명하게 강조하고 있다.이 시의 진정한 주어는 나가 아니고 " 잊어버려야 한다"는 필사적인 마음 자체라고 해도 좋겠다
실제로 잊는 것과는 별개로 잊어버려야 한다고 끊임없이 자신을 타이르는 것,차라리 격려에 가까운 이 방법을 통해 나는 "그 사람"과 "인사없이 헤어진 시방"을 수락하며 또 다를 날들을 살 채비를 한다
새로운 삶은 "나"의 힘겨운 실존을 모든 생명은 흘러가는 존재라는 대자연의 섭리와 "싸리꽃이 마구 핀" "잔디밭에 누워 마지막 하늘을 바라보는 내 그날"의 먼 미래를 연결시키는 성찰과 상상을 통해 열린다.
도정일의 말처럼, 문학은 인간이 경험하는 추락과 상처,상실을 처리하는 기술이다. 조병화는 그 미학적이며 존재론적인 기술을 쉽고 독특한 스타일로 구사했다. 그가 수많은 하루를 위해 썼을 이 시는 1950년 4월에 발간된 같은 제목의 시집에 실려 있다
선시집을 제외하고 총 53권의 시집 중 두번쩨 시집이었다 <문학평론가 김수이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