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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앙코르왓트

앙코르 왓트

by 에디* 2013. 1. 9.

오래전에 다녀온 캄보디아의 씨엠렙 앙코르왓트 사진을 꺼내본다

  여행 떠나기전에,  먼저 다녀 온 딸이 서규석교수가 쓴 "신화가 만든 앙코르와트"라는 책을 건네주며 읽고 가라 했다, 책을 보고 갔으나...막상 현장에 서니 생각이 멈춰서 통 헷갈리기만 했다... 그냥 갔더라면,대부분의 여행객들 처럼 앙코르와트 3회랑의 그 기가 막히는 부조를 별 감동없이 지나치지 않았을까~?
쿠루평원의 전투며,왕의행진.천국과 지옥,우유바다 젓기....등 부조를 흥미있게 보고 사진도 찍는데~ 야속한 가이더가 자꾸만 걸음을 재촉했다. 더욱이 회랑의 절반에 해당하는 부조들은 아예 보지도 않고 지나갔다.
이 모든 부조 하나하나가 기원전에 쓰여진 "라마야나"와"마하바라타"라고 하는 인도의 대 서사시에 나오는 장면이란걸 알지 않으면 의미없이 지나치고 말 것이다.
  천 년전에 꽃 피웠던 그 유적의 감동이 가슴에 아직 남아 있어, 다시 한번 그 책을 읽으며 마음속으로 더듬어 보고 있다.
신화의 나라 앙코르...밀림과 호수를 가르며~ 씨엠렙 지역에는 약 천 팔백개의 사원유적이 天界를 재현하고, 이끼낀 돌벽과 허물어지는 돌탑마다 신화속 주인공들의 천변만화의 춤사위가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장엄하고 불가사의한 건축미의 정수다

천년전에 왕들이 백성들을 얼마나 고생 시켰을까?하면서도 그 덕에 후손들이 관광수입으로 먹고살게 해 주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아름답고 웅장한 사원의 건축과 조각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천년유적을 매일 수천의 관광객이 밟고 오르니 보존대책이 필요하겠다.<2006.1.9.씨엠립> 

 

왕도(王都)를 뜻하는 앙코르는 같은 뜻을 가진 산트크리트어  나가라(nagara)에서 파생된 말로 노코르(nakor)->웅코르(ongkor)->앙코르(angkor)와 같이 음운변화를 일으켜 크메르어화한 말이다

"나가라"는 흰두신화에 신들이 거주하는 우주의 중심 "메루산"을 지상에 건설한 도시이며,크메르인들도 성스러운 쿨렌산에서 돌을 실어날라서 신의도시를 지상에 건설했는데 그것이 곧 "앙코르왓트"다

 

앙코르왓트 사원은 수리야바르만 2세(1113~1150)가 비슈누신에게 바치기 위해 지은 사원이며 그가 죽은 후에도 부분적으로 부조가 조각되는 등 37년 이상의 세월속에 건축되었다

 

  직사각형 인공호수 위로 다리를 놓고, 사원을 건축하였는데, 남북으로 1.3km 동서로 1.5km에 이르는 광대한 피라미드 사원이며 좌우 대칭미가 뛰어나다, 구조는 중앙에 있는 신전을 중심으로 3겹의 회랑이 감싸고 있고 회랑 바깥쪽에  벽을 만들고 그 외부에 저수지를 배치하여 사원을 속세와 구분짓는 공간개념을 반영했다

 

  세계문화유산의 하나인 앙코르와트는 아름답고 웅장하지만 사원에 대한자료가 전해지지 않는다,그래서 학자들 간에 왕궁인지 사원인지? 건축용도에 대한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1880년 프랑스의 학자 에이모니에는 민간에 전하는 전설을 토대로 왕궁이었다고 주장했으며,1296년에 앙코르와트를 방문했던 원나라의 주달관 은  이곳을 "노반(魯般)의 묘"라고 표현했다

1911년 조르쥬 세데스는 회랑의 부조를 관찰한 결과  비슈누신에게 바쳐진 신전이었으나 수리야바르만 왕의 사후에는 그의 묘가 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우주의 중심 중앙신전으로 올라가는 70도의 가파른 계단...신을 만나기 위해서는 감히 걸어서 들어 갈 수가 없다, 너무 가파르기 때문에 기어 올라야 한다, 중앙신전 꼭대기에서 보는 저녁노을이 장관이라는데...아마도 볼 기회는 오지 않겠다

 

  앙코르와트는 4면에 출입문이 있으며,정문은 서쪽에 있다, 동,남,북에는 각각 하나씩 정문인 서쪽에는 출입문이 5개나 되는데 이중 2개의 문은  코끼리부대와 기마부대인 주력군이 출입할 수 있도록 군사용이고 나머지 3개는 일반 출입자들이 사용했다 

 

  비슈누신이 사는 천상세계를 꿈꾸며 사후에는 극락정토에 가기위한 염원을 실현하려한 사원으로 장대한 스케일과 공간적 대칭미가  두드러지는데,사원의 기단,회랑,천정은 물론이고 눈길이 미치지 않는 곳까지 빈 공간이라고는 없을 정도로 사원전체를 신과 압살라,동물의 부조로 조각해 놓았다  

 

  도서관...호수위에 건설된 다리를 지나고 주벽의 탑문을 지나면 한쌍의 도서관이 좌우로 대칭을 이루며 있다,도서관은 제3화랑 앞 참배로 좌우에 1쌍,제2회랑 앞에 1쌍, 제1화랑 앞에 1쌍 모두 3쌍이 배치되어 있다

도서관은 경전과 같은 성스러운 종교서적과 의례에 필요한 물건,사원의 귀중품을 보관하던 곳으로  조르쥬 세데스가 "라이브러리"라고 지칭한데서 유래한 것이고 흔히 경장(經裝)이라고도 한다

 

  건축에 담긴 신의 코드들...숫자 58  108  432  864  1296  1728 의 공간배열

파괴와창조가 되풀이되는 힌두사상의 우주 싸이클을 지상에 그대로 재현한 곳이 앙코르와트이다,

모든 배치와 거리가 정확하게 큐빗과 페암이라는 단위로 설계되어 있는데,예를 들면,입구의 다리 길이가 188m인데 이를 환산하면 108페암이고 큐빗으로 환산하면 432 큐빗이 된다

쉽게 설명하기도 어렵고 내용이 긴데,신비의 숫자들을 학자들이 해석한 결과 힌두사상과 우주론 점성술을 사원안에 시간적 공간적으로 배치하였다는 사실이다  

  제3회랑 앞의 키가 큰 야자나무...야생 원숭이도 돌아다닌다

 

  앙코르와트 제3회랑 벽의 부조가 유명한데...천천히 다 보려면 며칠 보아야 할 것 같다, 대충 지나가며 보려니 아쉽기 그지 없다

제3회랑 부조의 주요 장면은 대략 10개인데,1,쿠루평원의 전투 2,시바신, 3,수리야바르만왕의 행진 4,천국과 지옥, 5,우유바다 젓기 6.비슈누신과 아수라 7, 크리슈나와 아수라인 바나의 전투 8.21명의 신과 21명의 아수라 9,비슈누신 10,랑카의 전투

 

  왕의 행진 부분...수리야바르만 왕이 19명의 대신들과 함께 펼치는 군사 퍼레이드로 왕의 자전적 스토리를 98m에 걸쳐 표현한 부조

 

압살라의 탄생...우유바다젓기의 부분

 

  우유바다 젓기 장면 부조...동쪽 회랑 벽면에 49m 길이로 부조되어 있는 힌두교의 천지창조 신화를 표현해 놓은 작품

  

제1회랑의 데바타(여신)상...천 여년 전의 작품으로 너무 아름답다...훼손되는 게 안타까움

 

  하나라도 허투로 조각해 놓은 게 없을텐데...앙코르와트 제2회랑의 데바타(여신)상

 

  밀림에 버려진 신화의 도시...1860년 프랑스의 식물학자 앙리 무오는 원주민들 사이에서 전설속의 신이 지었다는 앙코르 왕도를 방문했다,앙코르와트,바이온 프놈바켕에서  3주일을 보낸 그는 " 솔로몬왕의 신전에 버금가고,미켈란젤로와 같이 뛰어난 조각가가 세운  앙코르와트, 이는 고대 그리스 로마인이 세운 것 보다도 더 장엄하다"라고 그의 일기에 기록했다

그가 귀국하여 밀림속에 잠들어 있던 앙코르와트를 유럽에 소개하여 알려지기 시작했다

 

  왕도 앙코르는 공식적으로 802년부터 1431년까지 "캄부자"왕조에 의해 예술혼을 꽃피운 종교도시의 중심지였고, 역대 왕들에 의해서 7개의 대도시와 약 1200개의 사원이 들어서면서 힌두교와 불교의 문화가 융합되어 독특한 문명을 이루었다

 

  중앙신전의 어느 방을  들여다 보았더니, 붉은 옷을 걸친 신상이 서 있고, 참배하고 돈을 놓고 가기를 기다리는 노인이 앉아있다

 

이 방에도 제법 그럴 듯한 신상이 모셔져 있다.... 사진 찍기가 미안,

 

  신상이 여러곳에 있다

 

 

  그러면 이 찬란한 문명을 꽃피운 앙코르 왕조는 어쩌다가 망해서 밀림속으로 사라졌던 것일까? 802년에 자야바르만 2세에 의해 건국된 앙코르왕조는 26명의 공식적인 왕들이 통치하며 이어 오다가 자야바르만 7세 이후 급속히  쇠퇴경향을 보이고 1430~1431년 태국의 아유타왕조에게 점령을 당한다 태국 시암족의 앙코르 침략은 침략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600년 문화의 종말로 이어지고 말았다,과거 수백년간 앙코르왕국의 지배를 받았던 터이라 철저하게 유린했기 때문이다

 

  600년 이상 유지하며 경이로운 문화유산을 남긴 대제국의 몰락의 외부적인 요인은 태국의 침입이었다, 그러나 다른 시각도 있다

앙코르와트의 회랑 부조작업에 용병으로 고용하였던 미개인 타이족이 마침내 독립하여 정복자가 되었던 것이고, 앙코르 왕조의 잘 교육된 귀족들은 크메르 민중들과는 유리되고 있었다

 

앙코르인들은 아마도 외부의 침략을 자신들의 해방으로 환영했을지도 모른다, 오늘날 우리를 놀라게 하는 거대한 사원 건축에 필요한 노동력을 제공한 것은 물론이고 제국의 토양을 가꾸는 부역에 시달려 왔던 일들을  이제 그만 둘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정복자들은  피정복자들에게 보상으로 부드러운 소승불교를 선물했고 그것은 지친자들에게 놀라운 전파력으로 흡수 되었고 크메르인들은 저항감없이 짐을 벗어 던지고 기꺼이 그들의 종교를 받아 들였다

 

 

사원 밖에는 수련이 곱게도 피었고, 각가지 조악한 기념품을 파는 상점과 구걸하는 어린이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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