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詩 한 편367 여승 여승(女僧) 백석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佛經)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平安道)의 어느 산(山) 깊은 금점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十年)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 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2015. 7. 25. 패랭이꽃 패랭이꽃 류시화 살아갈 날들보다 살아온 날이 더 힘들어 어떤 때는 자꾸만 패랭이꽃을 쳐다본다 한때는 많은 결심을 했었다 타인에 대해 또 나 자신에 대해 나를 힘들게 한 것은 바로 그런 결심들이었다 이상하지 않은가 삶이란 것은 자꾸만 눈에 밟히는 패랭이꽃 누군가에게 무엇으로 남길 바라지만 한편으론 잊혀지지 않는 게 두려워 자꾸만 쳐다보게 되는 패랭이꽃 2015. 7. 21.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 같이 서정주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섭섭지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2015. 7. 14. 백련과 단둘이서 백련과 단 둘이서 신석정 백련 꽃 이파리에 사분대던 바람도 가고 멀리 떠나가고 천지엔 온통 백련 꽃 향기로 가득 차더니 이승도 저승도 아닌 세월을 엄청난 고요가 바다처럼 밀려와 칠월 한낮 죽음보다 조용한 하늘 아래 백련과 단 둘이서 이야길 하느니 사진 세미원 백련 2015. 7. 12. 연꽃을 보며 연꽃을 보며 이영춘 천지에 귀 하나만 열어놓고 바람소리 물소리 멧새소리 그 소리만 들으리라 천지에 입 하나는 사시사철 빗장으로 걸어매고 고갯짓으로 말하리라 좋은 것도 끄덕끄덕 싫은 것도 끄덕끄덕 끄덕이는 여운속에 언젠가는 마알간 하늘이 내 눈 속에 들어와 곱게 누우면 내 눈은 하늘이 되어 바다가 되어 귀 닫아도 들을 수 있는 눈 감아도 볼 수 있는 부처 같은 그런 사람 되면 내 온 살과 영혼은 꽃이 되리라 연꽃이 되리라 2015. 7. 10. 노랑꽃창포 창포꽃 강정순 누이는 흰 부라우스에다 5월 단아한 창포꽃을 달고 나는 푸른 물가에 비친 오누이를 따라 서방 정자 아래 왔었다 잊혀진 환상을 밟고 늘어선 누이의 젖은 발. 누이는 전신을 흩으려 물방울을 떨친다 시공을 달리하여 떨어지는 물보라 하늘이 고와 물보라에 비친 제 얼굴이 고와 누이는 하늘을 입맞춤하며 달려가다가 이승 간 못가엔 둥둥 창포꽃만 떴더라 누이야 네가 간 5월이면 나는 네가 가던 길로 따라와선 창포꽃 따다 물 위에 뿌리노니 너는 꽃되이 살아와선 나는 네가 좋와하던 별자리 되고 너는 내가 좋와하는 창포가 되어 한밤 내 꽃별 되어 얼려서 살자. 2015. 6. 23. 또 한송이 나의 모란 또 한 송이 나의 모란 김용호 모란꽃 피는 오월이 오면 또 한 송이의 꽃 나의 모란 추억은 아름다워 밉도록 아름다워 해마다 해마다 유월을 안고 피는 꽃 또 한 송이의 또 한 송이 나의 모란 행여나 올까 창문을 열면 또 한 송이의 꽃 나의 모란 기다려 마음 졸여 애타게 마음 졸여 이 밤도 이 밤도 달빛을 안고 피는 꽃 또 한 송이의 또 한 송이의 나의 모란 2015. 6. 10. 작약꽃 피우기 작약꽃 피우기 김삼경 사랑한다 그 말 한 마디 하기 위해 자음들, 모음들 또 많은 경들 달달달 곱씹었다 태중에서부터 되뇌이던 진언 안으로 꽁꽁 다져 마름질하던 주문 산새가 엿들을까 뭇꽃들이 훔쳐갈까 바람이 앗아갈까 두 겹 세 겹 책장 엮듯 굳게 말아 쥔 주먹 한방의 펀치로 무너 뜨리며 수류탄 터지듯 한 마디 펑 던진 화두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며칠 전부터 보아둔 아파트 화단의 작약꽃에 마침내 카메라를 들이대었다 화려하기 이를 데 없이 고운 꽃을 피웠건만 벌 나비들은 찾아들지 않네요 화려한 모양이나 색깔 가지고는 이제 곤충들을 유혹하기 어려운 시대인가? 며칠 후 다시 보니...花無十日紅일세 고왔던 모습은 자취도 없고 흉한 몰골로 가는 오월을 붙잡고 있네 2015. 6. 3. 꽃편지 <돌단풍> 꽃편지 홍수희 꽃 피더니 꽃이 집니다 산에도 마을에도 꽃이 집니다 강가에도 철길에도 꽃이 집니다 그리운 내 맘에도 꽃이 집니다 사람 살아가는 일이 다 그렇다고 보지 않으면 잊혀지다가 불현듯 또 그렇게 생각나다가 잊어지다가 쓸쓸히 지워지다가 다시 또 잠 못 드는 날 있겠거니 꽃 진 자리에 꽃 피겠거니 보고픈 정 어찌 다 지워지겠는지요 지는 꽃 내 마음에 거두지 않고 오셨던 그대로 놓아둡니다 2015. 5. 14. 이전 1 ··· 14 15 16 17 18 19 20 ··· 4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