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詩 한 편367 가을날 가을날 김현성 가을 햇살이 좋은 오후 내 사랑은 한때 여름 햇살 같았던 날이 있었네 푸르던 날이 물드는 날 나는 붉은물이 든 잎사귀가 되어 뜨거운 마음으로 사랑을 해야지 그대 오는 길목에서 불 붙은 산이 되어야지 그래서 다 타 버릴 때까지 햇살이 걷는 오후를 살아야지 그렇게 맹세하던 날들이 있었네 그런 맹세만으로 나는 가을 노을이 되었네 그 노을이 지는 것을 아무도 보지 않았네 2014. 10. 10. 영흥도 지울 수 없는 얼굴 고정희 냉정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얼음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불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무심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징그러운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아니야 부드러운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그윽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따뜻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네 영혼의 요람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샘솟는 기쁨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아니야아니야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는 당신이라 썼다가 이 세상 지울 수 없는 얼굴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영흥도 푸른 바다 반짝이는 물비늘 이 바닷가에 앉아 우두커니 노을을 바라 보았던 적 있지 빠져 나갔던 바닷물도 황혼도 밀려들어 오는데 아무 것도 아니야 한 줄기 바람이노라 지나간 세월의 시름들을 바다에 두고 가려고 했지 < 2014.10.5. .. 2014. 10. 7. 구절초의 북쪽 구절초의 북쪽 안도현 흔들리는 몇송이 구절초 옆에 쪼그리고 앉아 본 적이 있는가? 흔들리기는 싫어, 싫어, 하다가 아주 한없이 가늘어진 위쪽부터 떨리는 것 본 적 있는가? 그러다가 꽃송이가 좌우로 흔들릴 때 그 사이에 생기는 쪽방에 가을햇빛이 잠깐씩 세들어 살다가 떠나는 것 보았는가? 구절초, 안고 살아가기엔 너무 무거워 가까스로 땅에 내려놓은 그늘이 하나같이 목을 길게 빼고, 하나같이 북쪽으로 섧도록 엷게 뻗어 있는 것을 보았는가? 구절초의 사무치는 북쪽을 보았는가? 2014. 10. 1. 10월 엽서 10월 엽서 이해인 사랑한다는 말 대신 잘 익은 석류를 쪼개 드릴게요 좋와한다는 말 대신 탄탄한 단감 하나 드리고 기도한다는 말 대신 탱자의 향기를 드릴게요 푸른 하늘이 담겨서 더욱 투명해진 내 마음 붉은 단풍에 물들어 더욱 따뜻해진 내 마음 우표없이 부칠테니 알아서 가져가실래요? 서먹했던 이들끼리도 정다운 벗이 될 것만 같은 눈부시게 고운 10월 어느날 2014. 9. 29. 날마다 상여도 없이 날마다 상여도 없이 이성복 저놈의 꽃들 또 피었네 먼저 핀 꽃들 지기 시작하네 나는 피는 꽃 안 보려고 해 뜨기 전에 집 나가고, 해 지기 전에 안 돌아오는데, 나는 죽는 꼴 보기 싫어 개도 금붕어도 안 키우는데, 나는 활짝 핀 저 꽃들 싫어 저 꽃들 지는 꼴 정말 못 보겠네 날마다 부고도 없이 떠나는 꽃들, 날마다 상여도 없이 떠나는 꽃들 2014. 9. 29. 상처받은 자에게 쑥부쟁이 꽃잎을 상처받은 자에게 쑥부쟁이 꽃잎을 박남준 쑥부쟁이 그 목 긴 꽃그늘이 바람결에 사위어가는 강길을 따라 가슴에 못을 박은 사랑을 보냈는가 짐승처럼 웅크린 채 한 사내가 울고 있다 언젠가는 사랑에 비하면 오늘의 상처는 턱없이 가벼우리라 쑥부쟁이꽃들 그 여린 꽃잎 가만가만 풀어 보내 사내의 물결쳐가는 뒷등을 잔잔히 껴안는다 2014. 9. 22. 모싯대꽃 모싯대꽃 박남준 꽃이 있어 연보랏빛 작은 종 같은 초롱 같은 꽃등 그렁그렁 달고 눈물처럼 달고 오지 않는 기약없는 그 긴 기다림에 아예 꽃등을 걸어 온몸을 태우는 그 꽃이 오래도록 내 발길을 묶네 저만큼 하루해가 산너울 뚝뚝 떨구며 붉게도 지는 날이었네 2014. 9. 16. 물봉선화 물봉선화 정용주 어둠 저편 어둠 된 산에서 소쩍새 운다. 어둠 속에 웅크려 울컥, 토해내는 소쩍새 울음 더듬어본다. 오후에 그녀가 산을 내려갔다. 밤나무 검푸른 잎들이 천막을 친 응달의 비탈길. 나란히 걸을 수 없는 외길을 따라가며 보랏빛 꽃잎을 보았다. 바람에 흔들려도 떨어지지 못하고 비틀린 채 붙어 있는 꽃잎의 빛깔. 그녀는 서러운 빛깔의 꽃이름을 물었다. ...'어둠 속에 울컥, 토해내는' 소쩍새 울음소리 들리는 숲길을 그녀가 떠나고 있네요 그녀와 나란히 걸을 수 없는 외길이 슬픔과 고통을 말해 줍니다 물론 그녀를 붙잡지 못하는 긴 사연과 고통이 있었을 테지요 밤나무 숲 응달진 비탈길을 내려가는 쓸쓸한 그녀 뒷모습이 보일 듯 합니다 그러다가 그녀의 눈에, 비툴린 채 바람에 대롱거리며 달려있는 분홍빛.. 2014. 8. 25. 다 바람같은 거야 다 바람같은 거야 묵연스님 다 바람같은 거야 뭘 그렇게 고민하는 거니 만남의 기쁨이건 이별의 슬픔이건 다 한순간이야 사랑이 아무리 깊어도 산들 바람이고 오해가 아무리 커도 비바람이야 외로움이 아무리 지독해도 다 눈보라일 뿐이야 폭풍이 아무리 세도 지난 뒤에 고요하듯 아무리 지극한 사연도 한순간이야 쓸쓸한 바람만 맴돌지 다 바람이야 이 세상에 온 것도 바람같이 온다고 이 육신을 버리는 것도 바람처럼 사라지듯 가을바람 불어 그 곱던 잎들을 떨어뜨리는 것도 덧없는 바람불어 모든 사연을 공허하게 하지 어차피 바람일 뿐인 걸 굳이 무얼 아파하며 번민 하리 결국 잡히지 않는 삶인 걸 애써 무얼 집착하며 아파하나 그러나 바람 그 자체는 늘 신선하지 상큼하고 새큼한 새벽바람 맞으며 바람처럼 가벼운 걸음으로 바람처럼 살.. 2014. 8. 19. 이전 1 ··· 17 18 19 20 21 22 23 ··· 41 다음